오늘은 어딜 걸을까?
흑두루미가 자리를 잡을 동안만이라도 순천만에서 멀어지자고 생각했습니다. 생태수도인 순천의 행정력이 아직은 미약한가 봅니다. 순천의 새인 흑두루미가 안착할 시간만이라도 순천만 앞뜰에 사람이나 자전거,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안내하였으면 좋았겠습니다. 지금은 이러저러하니 출입을 삼가달라며 김학수 기자의 멋진 흑두루미 사진을 보여드리면 모두 감탄할 것입니다. ‘사진도 멋지지만, 순천은 생태를 생각하는 멋진 동네구나’하고 말이지요. 아예 조례로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사람은 내가 꼭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보살펴야 하는 그 무엇을 보면 애처로워하고 계획을 바꿔서라도 아끼고 돌보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마음,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이, 법과 제도가, 도덕과 관습이 될 수 있고 또, 작은 안내문 한 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꼭 그 갈대길을 걸어야겠다는 계획은 안내문 하나에 감화되어, 보지 않은 흑두루미를 마음에 담고 뒤돌아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도 순천만을 뒤로하고 여자만으로 향하였습니다.
비 온 새벽 장척마을은 고요합니다. 바다에서 뽈록 솟아오르는 물고기들과 쏘로록 빠져나가는 썰물 소리뿐입니다.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흐린 경계에 서너 척의 고깃배가 불을 반짝입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선 치열한 삶이 있겠지요. 멀리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더구나 경계의 삶, 가장자리의 생활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200일을 넘었습니다. 그 이후 가족들의 삶은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희생자 가족의 마음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맹골수도에 있기도 하고, 팽목항이나 광화문, 국회 앞, 청와대 앞에 있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그 마음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을듯하다고 어슴푸레 짐작합니다. 그 마음 하나하나에 여자만 새벽 바다의 평온을 촉촉이 적셔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희생자 가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나빠졌다느니, 지겨우니 이제 그만두라느니, 정치에 맡겨두고 지켜보자느니 여러 말이 나옵니다. 국민들로부터는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회지도층이나 정치인, 지식인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회나 국가의 남는 곳이 아닌 모자란 곳을,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현재가 아닌 내일을 더욱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위나 이익이 아니라 전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임을 자타가 인정하였고, 그렇지 않다면 그 권위를 당연히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측은지심이 없는 지도자나 지식인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이기가 아니라 흉기입니다. 이 흉기를 고치는 기술자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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