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아닌 공감으로 화평을
겨울비가 내린다. 몇 년 전 100여 년 만의 가뭄으로 농작물이 말라가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이 전 대통령은 유엔 정상회의에서 “200년 빈도의 기상이변에 대비해 추진된 4대강 사업으로 홍수와 가뭄 모두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유체이탈 화법은 ‘대통령 고유 화법’인지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참으로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정말 참으로 매우 무서운 일이다.
공감을 전제로 한 객관성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발달단계 중 2~7세를 전조작기라 부르며, 이때의 특성 중 하나를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했다. 일차원적 사고를 하는 그때의 아동은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는 줄 안다.
5살 된 아이가 친구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친구; 아가가 배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해.
아이; 자, 점심 식사하세요. 맛있는 두부에요.
친구; 여기에 주사 맞자. 꾹.
아이; 밥을 먹으면 튼튼해져요. 맛있다.
친구와 아이는 같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의 대화는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한다. 이러한 대화를 피아제는 ‘집단독백’이라 했다. 그런데 자라면서 자기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초등 고학년이 되면 자리 잡는 인지능력이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객관적 통합이 이루어진다.
객관적 중재의 가능성
객관성은 하늘에 붕 떠서 땅 아래 개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객관성은 통제된 실험실이 아닌 복잡하게 얼키고설킨 사회 속에서는 매우 힘들지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객관성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고, 상대의 시각으로 사고하는 ‘공감’이 전제가 된다. 그러한 공감 능력을 갖춘 객관성은 상호 이해를 불러온다.
이렇게 될 때 배제와 억압이 아니라,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으며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다. 나는 여기에 다다름을 ‘화평’이라 부르고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화쟁’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공감을 배제한 화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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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쟁이라니 - 꿩 대가리 수준이라니 [사진참조 : www.audubon.org] | |
고개를 이불 속에 파묻고 자기를 찾아보라는 아이에게는 자기가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볼 수 없으니 남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며, 꿩 대가리 수준의 자기중심적 행동을 한다. 아이들은 크면서 좋아지리라는 기대가 있으니 그 짓이 천진난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다 늙은 할머니에게 자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화쟁을 외치다니!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