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가 원산지인 코스모스는 가을꽃이다. 한약재 이름도 추영(秋英) 즉, 가을꽃이다. 한국에는 1910년대에 선교사가 들여와 자라기 시작했다. 순우리말로는 ‘살사리꽃’이라 부르는데, 소슬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양새를 본뜬 이름인 듯하다. 영어로 코스모스(Cosmos)는 질서 있는 조화로운 우주를 뜻한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이렇게 가냘픈 꽃을 질서와 조화의 우주, 코스모스라 이름 지은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바람, 이 혼돈을 바탕으로 코스모스는 움직인다. 얇고 긴 꽃대 위에 핀 꽃은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린다. 부드럽게 펼쳐진 꽃잎은 스치는 바람에도 떨린다. 이리로 저리로 흔들린다. 어쩌면 휘청거리고 떨리는 움직임을 바탕으로 질서와 조화는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카오스(혼돈)를 전제로 한 코스모스(우주)라야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질서나 조화는 죽어있는, 불변의 고정적인 사건이 아니다. 질서정연한 군대의 열병식은 그 대열 속의 개인을 거세한 죽음의 행진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올림픽 대회식장에 입장하는 선수단은 군대처럼 일사불란한 행진을 연출했다. 그 행진 속에 있는 선수 개인은 오직 전체 속의 부속품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똑같은 옷을 입고 무리 지어 입장하지만, 사진을 찍거나 동료와 손을 잡고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한 얼굴을 짓는 선수들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은 그를 이루는 주체들의 자발성이 극대화될 때에 비로소 잘 드러난다.
질서와 조화는 상호 인정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자기와는 다른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질서와 조화는 대립하는 주체의 갈등과 동요를 품고 있다. 고정불변의 죽은 질서가 아니라 살아 꿈틀대는 조화가 필요하다. 양성자와 음전자, 암컷과 수컷, 암흑물질과 별 등 하나의 생명체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그렇게 움직인다.
가족도 그렇다. 솟구치는 아침 해와 같은 아이들의 분방함과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저녁 해 같은 부모의 안정 추구욕은 서로 쉽게 화해할 수 없다. 사회도 그렇다. 기존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과 새롭게 재편하고 다르게 작동하도록 변화하려는 세력은 서로 쉽게 인정할 수 없다. 한 사람 속에서도 그렇다. 옳고 바른 꼭 지켜야 할 정의로움과 편하고 쉬우며 적당한 편리성은 서로 쉽게 용납할 수 없다. 놓여있는 곳곳이 쉽지 않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여린 코스모스가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