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도 없다. 아니, 무슨 이유로 다투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아주 작은 일이었던 것 같다. 원자력의 위험성이나 독점자본의 해체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는 정말 아니었다. 우리 부부의 다툼은 항상 하찮게 시작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문제로부터 마음이 상하고 결국엔 서로 투명인간 취급으로 귀결된다. 있어도 없는 척, 보아도 못 본 척, 그냥 그렇게 말도 안 하고 시간을 흘린다. 그러다 누군가 살짝 웃으면 그걸로 다시 원상 복귀된다.
여기저기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자기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통령부터 마누라까지 아주 아우성이다. 사람 살이의 기본인 소통이 왜 이리도 어려운가!
먼저 불통은 자기식대로 남을 재단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보고서, ‘이렇게 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라거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제는 다른 이에게 집중되어 있는 눈길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고자 하는 이유가 상호이해를 통한 관계 맺음이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 소통은 일방적 관철이나 소아병적 떼쓰기일 뿐이므로. 이는 한마디로 독재다. 독재는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한다. 아니 존재 자체를 없애려 한다. 안하무인으로 독불장군이다. 상대에게 복종만을 요구한다. 대화는 필요없다. 설령 대화를 해도 '너는 외쳐라, 나는 흘린다'는 식으로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소통의 단절은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입에서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를 듣고자 하는 대화는 무의미하다. 대화는 결론을 얻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공감하면 그때 비로소 마무리된다. ‘아, 그렇구나. 그땐 몰랐는데 이제 이해가 되네. 그때 당신이 그랬던 게 그래서였군.’ 으로 끝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자기의 작은 마음을, 흔들리는 갈대의 연약함을 오롯이 드러내야 하므로 매우 어렵다. 하지만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아는 만큼 행동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군자요 성인이다. 나는 보통사람이다. 하지만 보통사람도 흉내는 낼 수 있다. 자꾸 흉내를 내다보면 언젠가는 사이비 군자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당신이 아닌 ‘나’에 대한 말만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음, 그랬군.’하며 군자 흉내를 내보고 있을 뿐이다. 아직은 독재의 피가 용솟음칠 때가 더 많다. 아! 이를 어찌할꼬!
이정우 민들레하나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