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퇴근길이었다. 작은 트럭이 서 있는 골목은 어둑하다. 투박한 아저씨가 파는 것은 작은 나무 화분이다. 제법 나무가 다양하다. 다가서는데 치자 향이 콧속으로 밀려든다. 와우! 상큼한데 가볍지 않고, 깊은데 가늘지 않은 치자 향이다. 5천 원을 주고 화분 하나를 샀다. 묵직한 화분을 손에 쥐고 집에 가는 동안 마음은 빈손처럼 가벼웠다.
언제 물 한번 제대로 주겠냐는 마누라의 지청구도 웃음으로 넘기고 내 방앞 베란다에 모셨다. 뒹구는 화분에 얌전히 옮겨심고 아침저녁으로 눈짓 인사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물을 주었다. 마른 잎을 떨구고 새잎이 돋았다. 얼마 전에 소리 없이 가지 끝에서 꽃봉오리 몇 개가 올라오더니 슬그머니 꽃을 피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눈길을 붙잡는 하얀 꽃잎도 다소곳이 좋다. 그리고 깊고 상큼한 치자 향에 온 마음이 차분해진다. 동물까지 복제하는 최첨단사회에서 치자 향내 나는 향수 하나 못 만든다니 참...
향기만큼 귀중한 것이 치자열매다. 천연염료로 들뜨지 않는 노란 색깔을 낸다. 치자 물 들인 저고리를 입고 내리는 햇빛을 받으면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파릇한 새순 돋아나는 뒷산으로 소풍이라도 가야만 할 것 같다.
또 다른 치자 열매의 쓰임새는 치료 약재다. 수천 년 전부터 치자는 귀중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가슴 속에 꽉 찬 뜨거운 불덩이를 제거하는 데 매우 좋은 효과를 보이며, 가슴이 막혀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것 같은 증상을 말끔히 해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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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의 효과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병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증상이 매우 중요하다. 가슴 속에 오만 가지 걱정이 쌓여 있는 듯하고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워서 심란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에 좋다. 또, 잠을 자려 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생겨나와 편히 잠을 잘 수 없는데, 가슴에서 불이 나고 얼굴로 열이 화끈 달아오르는 증상에 효과가 있다.
가슴 속에 불덩이는 한 번의 정신적 충격으로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 차곡차곡 감정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모든 생명체의 가슴에는 불같은 감정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사람은 감정을 상징화하고 축적하며 이를 밖으로 드러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지 못하면 불덩이가 점점 커지고 그 결과 가슴이 막혀 죽을 것 같고 화열이 올라 심장병, 역류성 식도염, 고혈압, 우울증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병을 일으킨다.
마음을 비우는 것도 참 중요하다. 음식 섭취도 규칙적이고 양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슴에 응어리진 불덩이를 없애려면 치자에 검정콩을 발효시킨 두시라는 약제와 함께 물에 달여 복용하는 것이 좋다. |